보리심 확립

‘조상탓’이라는 원망을 ‘8할의 공덕’으로 바꾸는 지혜

semodok 2025. 8. 1. 11:42

‘조상탓’이라는 원망을 ‘8할의 공덕’으로 바꾸는 지혜

 

혹시 삶이 힘들 때 '조상 탓'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글은 그 원망의 화살을 거두고, 조상의 방문이 실은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짓'임을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그 손을 잡아주는 자비행이 어떻게 나에게 8할의 공덕으로 돌아오는지, 그 지혜로운 원리를 파헤칩니다. 원망을 공덕으로 바꾸는 지혜로운 여정에 동참해보십시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8282, 화병! 그리고 조상탓 입니다.'

 

한국은 정말 불교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맞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전생의 업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과거를 탓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원인을 찾기 어려우니 덮어놓고 믿는 맹신의 일종입니다. 이 과거탓의 또 다른 유형이 조상탓입니다. 양자물리학이 상식이 된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길거리에 나가면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를 아십니까?"

 

이 레퍼토리 아시죠? 관심을 보이면 이야기를 쭉~ 합니다. 결국은 이런 말을 하죠.

 

"당신은 참으로 공덕도 많고 지혜로운데, 조상복이 없어서..."

 

정말 조상탓일까요?

 

홀로 남겨진 영가, 왜 우리 곁을 맴돌까?

 

최근 우리는 사자의 서를 배웠습니다. 영가가 겪는 중음의 경험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임종 중음과 실상 중음 그리고 투생 중음입니다. 이 중 실상 중음과 투생 중음의 경우 분명 육체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가들은 종종 아니 자주 살아 생전 익숙한 장소를 맴돌게 됩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살아 있는 이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붓다스쿨 공부 과정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 기쁜 환생>에 소개된 델록 즉,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공부합니다. 그 내용을 통해 보면 영가들이 산 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분명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조상탓인가요?

 

원망스러운 방문 뒤에 숨은, 간절한 SOS 신호

 

살다보면 삶이 어려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돈이 없는 궁핍한 순간도 있습니다. 돈과 관계 없이 마음이 힘들어 정말 죽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이들은 가족일 것입니다.

자식이 힘든 순간 부모에게 찾아와 된장찌개를 끓여달라고 말하는 것이 죄인가요? 힘든 부모가 장성한 자녀에게 잠시 의지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가족이라면 상호간에 힘든 순간이 있을 때, 무너지는 하늘을 함께 받쳐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그 기간이 너무 길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영가가 찾아오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일생 동안 착하게 산 사람보다 나쁘게 산 사람이 더 많고, 수행을 한 사람보다 안 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죽음의 순간, 일생일대의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공덕이라는 자산은 평균적으로 너무 부족합니다. 대부분 임종 이후의 경험을 시작할 때, 지극히 가난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 습관처럼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 이것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요?

수행자는 반대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족이 힘든 순간 나를 찾아오는 것,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귀찮고 싫더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의 선택을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뿌리를 잊은 나무는 시들기 마련이다." - 옛 격언

 

그 손을 잡아줄 유일한 사람, 우리에게 남겨진 의무

 

한국의 문화 속에서 돌아가신 이를 위해 정성을 다해 공덕을 짓고 회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현재는 이 지혜로운 정신 문화가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가족간에도 서로 의존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전예수재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를 천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49재를 지내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천도재는 내가 지금 지내야 합니다."

 

영가는 급합니다. 공덕이 없을 때 경험해야 하는 고통이 매우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당장 몇 일 뒤에 염라왕을 만나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는 다른 영가들을 목격합니다. 이를 벗어나거나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공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공덕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기에, 살아 있는 가족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찾아가기도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런 영가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이는 영적 의무를 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뿌리를 잊은 나무는 시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가 때문에 생기는 이런 문제는 공덕을 대신 지어서 회향하면 해결됩니다. 영가가 만족하고 떠날테니까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가의 경우 의지할 곳이 여기 밖에 없으니 계속 찾아올 것입니다. 그럼 계속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겠죠?

 

"어둠을 탓하기보다 한 자루의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 - 존 F. 케네디

 

그렇다면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오롯이 남을 위한 희생이기만 할까요? 불교의 깊은 지혜는, 자비를 베푸는 행위가 곧 나에게 가장 큰 복을 짓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원리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천도재의 공덕 배분입니다.

 

가장 놀라운 진실 : 공덕의 7할은 기도하는 나의 몫

 

합동천도재는 그 자체로 보살행입니다. 첫째는 인지 범위에 있는 조상들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인지 범위에 없는 전생의 가족들을 구하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이타행이 아닙니다. 하화중생 뿐 아니라 상구보리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스님께서 천도재 이후 재주들에게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양 올렸던 과일을 가져가서 맛있게 드세요. 그럼 천도재의 공덕은 7:3이니, 살아 있는 분들에게 70%가 갑니다."

 

마음에 걸리는 영가를 위해 정성스럽게 공양 올리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만으로도 그 천도재의 공덕 70%는 기도자의 몫이라고 합니다. 이는 천도재를 위해 공양물을 준비하고, 기도에 동참하는 동안 마음에 축적되는 좋은 습관, 공덕의 힘입니다. 평균적으로도 이러한데 하물며 송덕사 합동천도재는 어떠할까요?

송덕사 합동천도재는 항상 죽음수업 법문이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이 법문은 일반적인 영가법문의 주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배우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입니다. 나아가 합동천도재의 전 의식에 해당되는 <자비도량참법> 참회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허물을 내려 놓을 수 있다면 이 역시 큰 공덕이 됩니다. 이런 프로그램 구성을 볼 때 제가 생각하는 천도재 공덕 배분은? 8:2 입니다.

'상구보리 8 : 하화중생 2'인 프로그램인 것이죠.

 

"천 개의 등불을 켜도 자기 등불의 빛은 줄어들지 않는다. 행복은 나누어 줄수록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붓다

 

조상탓도 내탓도 아닌, 우리 모두의 ‘무지탓’

 

조상 영가로 인한 장애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가와 나, 쌍방의 무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장애입니다. 영가는 자신이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가가는 것이 그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릅니다. 배운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리고 배웠다고 하더라도 너무 급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망각합니다.

이런 무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 죽음을 맞이하면 이를 도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히 수행자라면 지인의 죽음은 더욱 큰 의무이자 동시에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강렬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잊고 도와주지 않는 것, 이것이 무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티베트 사자의 서>의 다른 이름은 <바르도 퇴돌>로써 "듣는 것만으로 중음에서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경전 수업을 통해 배우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맞이한 가족 영가들을 위해 스승에게 부탁해 천도의식을 하는 효과와 세상을 위해 기부하여 공덕을 짓는 효과 그리고 나 스스로 영가를 위해 사자의 서를 독송해주는 수승한 효과를 배웠습니다. 이 모든 공부와 정진을 잊어버리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영가의 탓을 한다면 이는 얼마나 큰 무지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일방적인 '조상탓'도, 모든 짐을 져야 하는 '내 탓'만도 아닙니다. 영가의 절박함과 나의 영적 의무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 모두의 '무지(無知)'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지는 오직 지혜의 등불로만 밝힐 수 있습니다.

붓다스쿨에는 이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합동천도재 프로그램이 매월 매년 실행되고 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참회하시고, 공덕 지음으로 마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시길 축원합니다_()_